[대한민국 스포츠 100년](22)우승팀 못가린 창설 축구대회

정태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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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0-05-07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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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인 1921년 2월에 열린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 경기 모습. 이 대회는 준비 부족으로 우승팀을 가리지 못한 채 파행으로 끝나고 말았다.[매일신보 캡쳐]
정식 규칙 사용해 추운 겨울에 열린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

조선체육회는 창립대회인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마치고 3개월 뒤인 이듬해 1921년 2월 11일부터 사흘동안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를 개최했다.

날씨가 한창 추울 때인 신년 벽두(음력 기준)에 축구대회를 열게 된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첫째는 조선체육회 창립 발기인들인 강낙원, 김동철, 원달호, 현홍운 등이 개최를 서두른 때문이다, 고원훈 이사장을 비롯한 일부 이사들이 충분한 대회 비용을 마련하고 대회개최 요강 등도 차질 없이 연구한 뒤에 개최하자고 설득했으나 축구인인 현홍운 등의 주장이 워낙 강해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즉 축구가 야구보다 더 인기가 좋은 데도 불구하고 조선체육회 첫 사업을 야구에 빼앗긴데 대한 조바심과 야구에 대한 경쟁의식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는 대회 마지막 날인 2월 13일이 정월 대보름이라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다는 기대감도 작용했다.

무엇보다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정식 축구경기 규칙을 사용해 대회를 개최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비록 아사히신문사(朝日新聞)가 발행한 운동연감에 있는 축구경기 규칙을 우리말로 번역해 적용했지만 이전까지는 소위 ‘들어 뻥’이라는 전근대적 축구를 한 것과 비교하면 전조선축구대회를 통해 비로소 축구가 스포츠로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즉 이전에는 힘으로 밀어붙이고 걸핏하면 상대편을 걷어차는 반칙행위가 다반사였다. 중간에 공이 있으면 기어코 내가 차야 하겠다는 의욕과 상대에게 질 수 없다는 투지까지 겹쳐 심한 몸싸움이 벌어지는가 하면 오프사이드 반칙은 아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심심찮게 판정을 두고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처음으로 열리는 대규모 대회인데다 역시 처음으로 경기규칙을 적용함으로써 첫날 경기부터 혼란이 일어났다. 대회가 열리기 전에 참가팀들에게 경기규칙을 미리 배포해 익히도록 하고 경성에서는 규칙 해설까지 했으나 하루아침에 이를 익힌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매 경기마다 심판 판정에 항의, 불복, 기권이 잇따랐다. 심지어 심판들마저 경기규칙에 어두웠으니 판정 시비는 어쩌면 당연했다.

요즘으로 보면 경기규칙도 이상했다. 득점이 있을 경우에는 많은 팀이 이기는 것은 당연하지만 득점이 서로 없거나 똑 같아 무승부가 되었을 경우에는 코너킥과 프리킥을 각 1점, 페널티킥은 득점이 안 된 것만 2점씩으로 계산해 이를 합계해서 많은 점수를 얻은 팀이 승리했다. 이것마저 같을 경우에는 연장전을 벌였다. 중앙이 배재와의 2회전에서 서로 득점 없이 비긴 뒤 벌점으로 패하게 되자 기권하고 만 것은 바로 이 규정이 빌미가 됐다.

이처럼 시행착오를 겪은 첫 대회였지만 처음으로 치른 전조선축구대회를 통해 선수 및 임원 모두가 경기 규칙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조선체육회는 조선체육회대로 대회 운영에 경험을 쌓으면서 전국 규모대회를 창설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전국에서 18개 팀 참가하는 대성황 이뤄
근대식 축구로 첫 출발을 한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에는 예상밖으로 많은 팀들이 참가했다.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에 중학단(학교팀)과 청년단(일반팀)에 각각 5개팀 씩, 더구나 모두 경성에 있는 팀들만 참가했으나 축구대회에는 전국에서 모두 18개 팀이 몰렸다. 그만큼 전국에 축구열기가 대단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전해 11월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가 열렸을 때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1차 정간을 당하는 바람에 매일신보가 후원을 했듯이 이때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여전히 정간에서 풀리지 않고 있는 바람에 똑같이 매일신보가 후원을 했다.

매일신보는 2월11일자 신문에 “건아의 축구 대경기에 우승기는 누구에게?”라는 제목으로 예고 기사를 다음과 같이 실었다.

참가팀으로 말하면 실업팀으로 열한단체가 있는바 지방으로 말하면 평양숭실축구단과 무오단, 올평양축구단과 경상남도 동래에 있는 동래구락부 운동단과 충청북도 청주군에 있는 청주청년회축구단이 이미 도착하였고 시내로 말하면 청도교청년회와 조선불교청년회, 한성은행축구단, 연희구락부, 배재구락부, 반도구락부 등이요. 학생측으로는 일곱 단체가 참가했는데 정주오산학교, 배재고등보통학교, 휘문고등보통학교, 중앙학교, 보성고등보통학교, 경신학교, 청년학관 등인바 모두 열여덟 단체이다. 11일에 입장식을 갖고 아홉시부터 경기가 시작될 터인바 당일은 실업 측 선수들만 시내 보성전문학교에 모여서 유니폼을 입고 씩씩한 태도로 종로통을 통과하여 본사 앞에 이르러서 플레이를 부른 후 대회장인 배재학당 운동장으로 향하여 입장식을 마치고 실업팀의 예선경기를 할 터인 바 ~ (이하 하략)” (매일신보 211일 자)

입장료는 대인 20전, 소인 10전으로 3개월 전에 열린 야구대회 때(대인 10전, 소인 5전)보다 2배나 비싸고 날씨마저 추웠으나 5~6천명에 이르는 관중들이 들어차는 대만원을 이룸으로써 새삼 축구의 인기를 실감케 해 주었다.

흥행 성공, 진행 낙제…창설대회 우승팀 가리지 못해
이렇게 전국에서 팀들이 참가해 성황을 이루었지만 대회 요강이나 경기 규칙 등을 좀 더 연구하고 개최해야 할 대회를 의욕만 앞세워 진행하다보니 이곳저곳에서 말썽이 속출하면서 제대로 진행이 되지 않았다. 더구나 대회 직전에야 배포한 경기규칙은 오히려 혼란을 빠뜨리는 격이 되고 말았다.


경기는 첫날 실업단 경기에서 잇단 판정 불복에다 항의로 다소 말썽은 있었지만 배재구락부가 한성은행을 6-0, 연희구락부가 동래구락부에 1-0, 무오단과 청주청년회가 불교청년회와 반도구락부에 성적으로 승리를 거두고 2회전에 올라 무난히 진행되는 듯 했다. 하지만 이틀째인 학생부 1회전에서 배재고보와 맞붙은 경신학교가 판정에 이의를 제기하며 기권하면서 드디어 대회가 파행으로 치달을 조짐을 보였다.

이에 조선체육회는 “축구의 본고장인 영국에 축구를 한 우리나라 사람이 인천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그를 수소문해 심판으로 투입했다. 그는 바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킹스칼리지에서 축구를 하다 귀국한 영국 석유회사 경성지점장인 서병희였다. 그는 인천에서 살며 경성으로 출퇴근을 하고 있었으며 초기 우리나라 축구 심판계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영국에서 축구를 배운 서병희의 심판 솜씨는 역시 뛰어났다. 서병희의 능수능란한 심판 솜씨에 잘 진행되던 경기는 결국 마지막 날 사단이 나고 말았다.

전조선축구대회의 제3일 결승전은 14일에 거행되었는데 이날 관중은 7~8천명에 이르렀고 선수들과 응원단들이 좌우로 포진해 긴장감이 흘렀다. 사람마다 과연 우승기는 어디로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이날 경기는 실업팀으로는 올배재(배재구락부)와 연희전문 등 3팀이고 학생 팀으로는 중앙, 배재, 휘문, 정주오산학교 등 4팀이었다. 예선 경기 제2일째 경신학교와 배재가 싸운 결과 심판의 판정이 불공평하다며 여러 가지 학생으로서는 능히 행하지 못할 행동을 하고 경신이 물러간 뒤 중앙과 배재가 제2회전을 하게 되었는데 양편이 서로 골, 즉 점수로는 한 점도 없고 성적으로 다투었던바 또 양편이 다소간 분쟁이 일어나자 조선체육회를 이해하겠다는 뜻으로 중앙이 탈퇴를 하였으며 정주오산학교 팀은 평양사람들의 충동으로 또한 탈퇴를 하고 휘문과 배재의 두 팀만 남아 결승전을 하게 되었다.

실업팀은 배재구락부와 평양 숭실구락부가 제3회전을 하게 되었는데 숭실이 기능이 부족해 패하게 되자 또한 심판이 불공평하다는 연유로 심판의 명령에 복종치 않아 하는 수없이 심판은 규정에 의하여 퇴장을 명하였다. 이것이 큰 불평이 되어 평양서 올라 온 단체와 또는 평양사람으로 경성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이 배재팀을 무슨 원수같이 보아서 싸움을 하는 바람에 중학 팀의 배재 또한 조선체육회를 위하여 탈퇴를 하였으며 또한 휘문도 그 뜻으로 탈퇴를 선언하였다. 그럼으로써 이 대회는 원만히 끝나지 못하고 중지하게 되었다.”(매일신보 19212163)

매일신보는 이렇게 간단하게 보도를 했지만 실제 내용은 더 복잡하다. 청년단의 배재구락부와 평양 숭실구락부의 준결승전은 서병희 주심이 숭실구락부에 오프사이드를 선언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이에 숭실구락부가 강하게 불만을 토로하며 불복하자 서병희 주심이 퇴장을 명했고 이에 두 팀은 서로의 주장만 강하게 주장하다 경기가 중단되고 말았다. 여기에다 관중도 서울과 평양으로 갈라져 주먹다툼이 오가는 수라장이 되어 이날 열릴 예정이던 청년단 경기는 물론이고 중학단의 결승전까지 치루지 못했다. 이 문제는 이튿날까지 이어졌으나 해결되지 못한 채 남은 모든 경기가 유야무야로 없어지고 말았다. 결국 창설대회에 우승팀이 없는 대회가 되고 만 것이다.

이를 두고 매일신보는 ‘만천하의 대대적 환영리에 개최된 전조선축구대회의 제3일 결승전은 부득이 중지’라는 큰 제목에다 ‘선수의 성벽이 너무 과한 연고로 그만 중지되었다며 ‘타파…지방열’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조선체육회 고원훈 이사장은 “실로 유감입니다. 지방에서는 적지 않은 돈을 쓰고 올라왔다가 그만 중지를 하게 되어 경성에 있는 여러 운동단체보다도 한층 더 미안합니다. 이번 대회에 중지된 것으로 말하면 순전히 지방열 때문입니다. 첫날이던 이튿날이던 심판들에 대해 불평이 많이 나와 심판들도 모두 사직을 하니, 상당한 심판을 찾아 인천까지 가서 영국에서 풋볼선수로 유명한 사람을 데려 왔는데 그도 또한 못한다고 하니 그들의 요구에 적합한 심판은 어떠한 심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여간 유감이올시다. 체육회의 부덕한 소치라고 하겠지요.”라고 한탄했다.

[정태화 마니아리포트 기자/cth08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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