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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스포츠100년](14)조선체육회 창립에 이르기까지(하)

2020-04-10 09:26

1920년 3월 5일 조선일보가, 그리고 4월 1일에는 동아일보가 각각 민족지로 창간되면서 체육과 언론이 공존하는 시대를 열게 되었다. 조선일보 창간지(왼쪽)와 동아일보 창간지(오른쪽)
1920년 3월 5일 조선일보가, 그리고 4월 1일에는 동아일보가 각각 민족지로 창간되면서 체육과 언론이 공존하는 시대를 열게 되었다. 조선일보 창간지(왼쪽)와 동아일보 창간지(오른쪽)
동아일보 창간과 변봉현의 등장

야구선수 출신들을 중심으로 결사 움직임이 움틀 무렵, 변봉현이 서울에 나타난 것은 1919년 7월이었다. 1918년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인 평북 박천에서 쉬다가 상하이에서 귀국한 설산 장덕수를 만나 취직 부탁을 하기 위해 서울에 온 것이었다. 황해도 재령 출신인 설산 장덕수는 독학으로 판임관 시험에 합격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와세대 대학 정경학과에 입학에 고학으로 4년을 버티면서 2등으로 졸업한 입지전적인 인물. 따라서 변봉현은 설산의 와세다 대학 2년 후배이다.

변봉현은 와세대 대학 재학시절 야구 2군 선수로 활약하기도 했으며 1909년 7월 21일 제1차 도쿄유학생 모국방문 경기 때 2루수로 참석한 야구인 출신이어서 이중국, 이원용과 어울린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스포츠에 깊은 관심을 보이던 약관 20대의 청년들은 일제 식민정책 아래 웅지를 펴지 못하는 신세 한탄과 더불어 1920년 벨기에 앤트워프올림픽을 화제에 올리면서 한국 청년도 올림픽에 출전할 기회를 가질 자격이 있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특히 이들은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에 서울에 있는 일본인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체육협회를 조직한 사실에 대해 자칫 조선선수들이 설 땅을 잃게 될 것을 크게 우려했다. 조선선수들이 올림픽에 참가하고 체육 문제 전반을 체계 있게 통괄 조정하고 선수 육성과 권익 보호를 위해 나설 수 있는 기구 설립이 급선무라는 데 이견이 없었다. 이에 따라 이중국, 이원용, 변봉현이 동지 규합에 나서 도쿄유학생들인 윤기현, 유문상, 이상기, 이동식, 임긍순, 김병태와 중앙기청 출신의 현홍운, 홍준기 등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발기인 총회 준비는 광신양화정과 경성직물회사 사무실을 이용했다.

이런 가운데 1920년 3월 5일 조선일보가, 이어서 4월 1일에 동아일보가 창간되었고 동아일보 논설주간 설산 장덕수의 추천을 받은 변봉현은 동아일보 기자가 되었다. 변봉현은 조선체육회 창립 산파역으로 동아일보가 적격이라는 확신을 갖고 이중국과 이원용의 동의를 받았다.


동아일보가 창간 초기 조선체육회 창립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사주인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창간 당시는 투옥 중, 후에 사장으로 취임), 논설주간 설산 장덕수 등이 국권 회복을 위해서는 “독립을 쟁취할 실력을 쌓아두었다가 국제 정세의 변동을 기민하게 포착해 국권 회복 운동을 집중적으로 전개하여 성과를 거둔다”는 소위 ‘기회론’에 사상적 무게를 둔 동지들이었다.

송진우는 “이조 500년 문약은 조선 민족을 육체적으로 쇠약케 하는 동시에 민족 문화 전반에 퇴보를 하게 만들었다. 우리 민족의 생활 전반에 있어서 오직 스포츠맨십 정신을 굳게 파악하여 스포츠맨십으로서의 생활의 지표를 삼기를 바라는 바이다.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그 마음을 잃지 말아야 그 장래가 촉망된다”고 할 정도로 스포츠의 정신적인 가치를 강조했다.

장덕수는 “우리와 같이 경기장에 입장한 다른 민족은 혹은 백보를 앞서고, 혹은 천보를 앞섰는데 이를 따라잡아 그와 동등하게 참여하고자 한다면 백배, 천 배의 노력을 더해야 한다”며 우리들의 체력으로 이것이 가능하겠는가라고 탄식했다.


이 같은 동아일보 창간 당시 경영진의 정서는 이제 갓 신입 기자로 입사한 변봉현에게 넓은 지면을 할애하여 체육 기관의 설립에 적극 나서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변봉현, 세 차례 논설로 조선체육회 설립 당위성 설파
1920년 4월 1일 창간한 동아일보 창간사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디딘 변봉현은 10일 만인 4월 10일 평파(平波)라는 필명으로 세 차례에 걸쳐 ‘체육 기관의 필요를 논함’이라는 논설을 게재했다. 기자 경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변봉현이 출근 10일 만에 그것도 4면 밖에 없는 금쪽같은 지면에 세 번씩이나 기사와 지면을 할애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동아일보 경영진들이 조선인 체육기관 설립을 찬동하고 동조를 한 때문이었다.

변봉현의 이 논설은 우리나라 스포츠 총 본산인 조선체육회를 탄생시킨 기념비적일 뿐 아니라 동아일보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도 큰 역사성을 갖는다.

변봉현은 첫째 논설에서 “요즘 우리 사회는 운동에 대하여 깊은 관념이 없었고 운동가에 대하여도 응원과 동정이 없어 운동의 발전을 기하고 장려를 하지 않았다”며 “운동을 경시한 세태를 경고하고 장래의 운동계를 위하여 여기에 관심 있는 청년들은 적극적으로 설립하는 데 참가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이어 이틀 뒤인 4월 12일 ‘동지를 규합하라’는 제목의 두 번째 논설에서는 “사회 만반사를 막론하고 일을 위하여 결합이 없으면 도저히 하지도 못하고 될 수도 없다”면서 운동가들이 더불어 접촉하고 제휴하고 유의인사들도 참여해 줄 것을 강조했다. 여기서 변봉현은 유의인사에 대해 비록 운동가는 아니나 운동에 대해 많은 취미를 가지고 애호하는 인사를 말한다고 정의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논설에서는 ‘경비를 변통하라’는 제목으로 하루 뒤인 4월 13일에 게재됐다. 변봉현은 기관을 설립하고 운영하기 위해서는 경비 문제가 최 우선으로 해결되어야 된다고 강조하고 지금이 신기원 창건의 적기인 만큼 유지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호소했다.

변봉현은 이러한 세 차례 논설문에서 우리 사회가 체육에 대해 이해가 부족함을 통렬하게 지적하는 한편 국민들, 특히 청년들의 활발한 일상과 건전한 정신을 함양하기 위해서는 이를 지도할 기관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이 지도할 기관을 창설하기 위해서는 뜻이 있는 청년 즉, ‘유의 청년’들이 동지를 규합해야 하며 유지인사들이 경비를 변통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체육기관의 필요성을 논함이라는 논설문이 발표된 것을 계기로 유문상의 경성직물회사와 이원용의 광신양화점은 체육 기관의 설치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이를 준비하려는 이른바 유의청년들의 발기준비 사무실로 분주했다.

[정태화 마니아리포트 편집인/cth08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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