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스포츠 100년](10)신여성들의 스포츠활동(하)

정태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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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0-03-27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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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스포츠는 여성의 복장변화에도 한몫을 했다. 1920년대 이화여고 정구부 선수들의 복장〈사진이화 백년사에서〉
여성의 복장 변화 이끈 스포츠 활동

1910년 일본의 강제 병합 이후 여자 중등학교 학생들이 주축을 이룬 여성 스포츠선수들은 조선 사회에 여성에 대한 봉건적 인식을 개혁한 시발점이나 마찬가지였다. 남학교와 마찬가지로 여학교에서도 체조와 육상이 먼저 소개되었으나 실제로 경기로서 대회가 열린 것은 한참 뒤였다. 육상은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주동이 돼 만든 조선체육협회가 1920년 5월 16일 춘기육상대경기회를 연 것이 처음이고 심지어 체조는 1931년 10월 31일 제1회 전조선기계체조대회가 우리나라 한국 체조 대회의 효시였다.

이처럼 체조와 육상이 학교체육에서 일상화되고도 뒤늦게 경기화가 되었지만 농구, 배구, 탁구, 스케이트 등은 오히려 늦게 시작하고도 빠르게 대회가 열리면서 여자 선수들 육성에 디딤돌이 되었다. 이런 다양한 종목들의 여학교 보급은 여학생들의 운동 복장도 덩달아 변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1920년대 초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교내 운동장에서는 배구와 농구를 배우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 흰색저고리에 검정치마, 그리고 긴 댕기머리의 전통적인 상태였다. 그러다가 1927년에는 학생들에게 흰 블라우스에 검은 블루머(짧은 스커트가 달리고 발목을 맨 바지)로 된 체육복을 입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체육복이었다. 1931년에는 숙명여고보에서 정구 탁구선수들이 허리띠가 있는 원피스형 흰 유니폼을 입었고 빙상이나 체조시간에는 세일러복 상의에 블루머와 계절에 따라 다른 색의 스타킹을 신었다.

이런 복장 변화는 여학생들의 체육에 대한 인식이 점차 변해가고 활동도 정적인 상태에서 동적인 형태로 바뀌는 과정임을 알게 해 주는 데 일부 학생들은 드러난 살을 감추기 위해 다리에 수건을 감고 경기에 나서는 진풍경도 있었다.

여성들의 활발한 경기대회 참가
농구는 이화학당 제3대 학당장인 페인이 1911년 학교체조시간에 농구를 가르치도록 한 것이 우리나라 여자농구의 첫 걸음이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교내 체육으로만 그치다가 1920년에 들어서 비로소 농구팀을 구성했으며 1925년 2월 이화여전이 재경서양여자팀과 친선경기를 하면서 공개적으로 발전됐다. 우리나라 여자농구 최초의 공개 경기다.

또 숙명여고보는 1926년 10월 제2회 조선신궁대회에 우리나라 여자농구팀으로는 최초로 출전한 여고팀이었다. 그 뒤 숙명여고는 해마다 일본인 여고팀만이 참가하는 농구대회에 참가했으며 1928년 10월, 제4회 조선신궁대회에서 창단 이래 드디어 첫 우승의 영광을 맛보았다. 진명여고는 1929년 봄에 정구와 육상 선수 중에서 농구 선수를 선발해 팀을 구성했으며 이화여전은 1935년 제1회 전조선여자농구대회를 주최해 여고 농구팀에게 공식대회 참여 문호를 열어주었다. 이때 참가한 학교는 배화, 동덕, 정신, 이화, 보성, 호수돈, 영생여고 등이었다.

배구는 선수 간에 신체적 접촉이 없고 과격하지 않아 여성에게 알맞은 운동으로 인식되는 바람에 레크레이션에 그쳤다가 1936년에 공립학교인 제1고녀, 제2고녀, 경성고녀 등에서 배구부가 생겼으며 이어 숙명, 진명, 이화, 동덕 등 사립학교로 확산되었다. 우리나라에 언제, 어떤 경로로 들어오게 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탁구는 비교적 빠른 1924년 1월 경성일일신문사에서 주최한 ‘핑퐁경기대회로 대중 스포츠로 보급되기 시작했으며 이듬해인 제2회 대회부터 여자선수가 참가해 이용염(경성여고)이 우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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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이화 야구부 3연승〈사진 이화백년사에서〉
축구는 여학교에서 언감생심 할 엄두를 내지 못했으나 의외로 야구는 여학교에서도 한 흔적이 남아 있다. 1925년 3월 5일 마산 의신여학교에서 막 졸업장을 받아든 졸업생 14명이 4명의 인솔교사와 함께 진주로 넘어와 시원여학교 여학생과 야구경기를 했다.(한국야구사, 1999년 발행) 이 경기가 주선된 경위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마산 의신여학교가 농구보다도 더 득점이 많은 48-40으로 승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한국야구사에서 밝힌 유일한 여자야구이다. 그렇지만 이화 100년사에서는 1928년 이화 야구부 3연승이란 사진과 1934년 야구대회 우승기념 사진이 실려 있어 여학교에서도 야구가 성행한 것으로 추측이 된다. 여자야구는 1935년 소프트볼이 도입되면서 자연스럽게 남자들의 전유물로 남게 됐다.

1920년대에 보급되기 시작한 스케이트는 여학교에서 겨울에 정구장을 스케이트장으로 만들어 학생들에게 장려했으며 조선일보도 여성체육을 장려하기 위해 1935년 한강에서 조선여자빙상경기대회를 처음으로 열었다. 일본계 언론사인 조선신문사는 1924년 6월 29일 경성사범학교 운동장에서 제1회 조선여자올림픽대회를 개최하였으나 일본 여성들만 참가하고 우리나라 여성들은 참가하지 않다가 1925년 제3회 대회부터 참가해 일본을 압도하는 경기력을 선보였다. 여자올림픽대회는 처음 육상경기만 하다가 뒤어 농구, 배구, 스케이트가 추가되었다.

남성출입을 금지한 전조선여자정구대회
여성 엘리트 체육의 효시는 동아일보 주최로 1923년 6월 30일 제1고녀(경기여자고등학교의 전신) 교정에서 열린 제1회 전조선여자정구대회였다. 동아일보는 이 대회를 개최하기 보름전인 6월 14일부터 대대적으로 대회 개최 기사를 게재하며 각 학교의 출전을 독려했다.

“남자의 운동은 경향은 물론이고 상당히 권장되어 볼만한 성적이 많으나 아직 여자 방면에는 별로 생각이 돌아가지 못하였으며 더욱이 항상 방안에 들어 있는 시간이 많아 운동이 극히 부족한 조선 여자의 체질은 다른 나라 사람에 비하여 매우 허약함으로 여자의 운동을 권장함이 긴급함을 통절히 깨달은 본사에서는 이에 대한 사럽을 개척하여 여자의 운동권장을 시작하고자 우선 경성 안에 있는 각 사립여학교의 당국자와 여러 가지로 협의한 결과 학교당국자도 평소에 이일에 대해 깊이 필요를 인정한 바이라 여자의 체질에 가장 적당한 정구를 선택하여 대회를 열기로 내정한 바 금월 하순에 경성에서 조선여자정구대회를 대대적으로 열기로 준비중이므로 상세한 규정은 일간 각 여학교 당국자가 회동하야 결정한 뒤 발표할 터이며 경성 이외 각 지방의 여자학교에서도 기술의 우열과 경기의 승부만 생각하지 말고 조선 전체 여자의 체육을 발달시키려는 취지에서 처음 생기는 이번의 대회에 많은 참가를 바란다.”(동아일보 1923년 6월 14일 일부 요약)

동아일보는 경기진행순서, 심판원결정, 입장권 발행, 관람할 때의 주의사항, 상품소개 등을 상세하게 안내했는데 이 가운데 이채로운 것이 바로 입장권 발행이었다.

“이번 대회는 처음 보는 구경이라고 입장을 희망하는 부인이 매우 많음으로 도저히 일반에 공개할 수가 없어 참가학교 학도의 가족 되는 부인에게 입장권을 보내고 그 외에는 본일 발행하는 동아일보에 인쇄한 입장권을 베여 가지고 오는 부인에게 한하여 입장을 허락할 터이며 남자는 입장을 거절할 터이라.”

즉 남자들은 입장을 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아무래도 여학생들이 처음으로 일반에게 공개적으로 하는 경기인 탓에 남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가능성에 대비하는 한편으로 여학생들이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경기대회를 즐길 수 있도록 한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 장안에 화제를 일으킨 이 대회에는 경성 인구(25만 명)의 10%가 넘는 3만 명의 관중이 몰렸으며 초대받지 못한 남성들은 학교 운동장이 내려다보이는 나무 위에 올라가 관전을 할 정도였다. 흰 치마저고리에 백색 긴 양말을 신고 댕기드린 머리에 하얀 천을 동여 맨 여자선수들의 모습은 활기에 넘쳐 있었으며 관중석을 가득 메운 여자응원단의 삼삼칠 박수 광경은 장관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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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에서 1923년에 우리나라 첫 여성 엘리트 체육대회로 창설한 제1회 전조선여자정구대회 경기 모습〈동아일보에서 캡쳐〉
전조선연식정구대회는 제5회째인 1927년에 들어 일반인들에게 관람을 허용해 여성 스포츠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이 변화됐고 또한 여성들의 스포츠 참여가 정착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순탄할 것만 같은 이 대회도 1936년 8월 29일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사가 폐간됨에 따라 중단되었다가 1937년 6월 2일 동아일보가 복간되면서 3년 만인 1938년 9월 24일 제16회 대회부터 재개되었다. 그러나 1939년 제17회 대회까지 이어오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중지되고 말았고 광복 후 속개돼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으며 단일 종목 대회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이보다 앞서 1919년에 일본인이 경영하는 경성일보가 주최하는 전조선여자정구대회(동아일보 주최 대회와 같은 이름)가 단체전 위주로 했던 동아일보 대회와 달리 개인전 위주로 경기를 했으나 우리 선수들은 참가하지 않았다. 일본인들에 의한 대회라 하여 우리 선수들은 출전을 망설여 왔는데 동아일보가 대회를 주최하면서 일본 여자선수들의 참가를 허용함에 따라 우리 선수들도 1927년 9월29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제9회 대회부터 출전해 이화의 이보패, 김복림이 당당히 우승해 한국여성의 기개를 드높였다.

YWCA와 조선여자체육장려회
3·1 운동을 계기로 일제는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정책을 변경하면서 1920년 7월 13일 조선체육회가 창립되고 이어 각종 근대스포츠 경기들이 활성화되면서 각종 체육단체들이 생겨났으나 이들 대부분은 남성 중심이었다. 이 시기에 여성들의 체육활동도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각종 여성단체들도 결성이 되었지만 대부분 교육 문화 분야에 그쳤고 여성 스포츠단체는 YWCA와 조선여자체육장려회 정도였다.

김활란, 김필례, 유각경 등이 주도해 1922년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 연합회로 창설된 YWCA 초기 활동은 계몽, 교육, 여권신장, 생활개선, 물산장려 등이었으나 학교체육과 더불어 사회체육 활동에도 관여했다. 이화여전은 1923년에 독자적으로 YWCA를 조직해 농구, 정구, 야구 등 구기종목과 육상, 수영, 스케이트, 등산 등을 장려했다.

YWCA가 YMCA와 마찬가지로 선교를 목적으로 한 체육활동을 보급했다면 1930년 5월 30일 김인순 등 50여명이 발기해 동덕여고보에서 창립한 조선여자체육장려회는 일제 강점기에서 여성 체육 장려를 목적으로 한 유일한 여성체육단체라고 해도 무방하다. 조선체육장려회는 창립 취지서에서 장차 이 나라의 주인이 될 아동의 심신이 건강하자면 먼저 어머니의 건강이 우선되어야 하고 아동의 보육을 담당할 부녀자의 체육에 관한 지식과 기능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강조했다. 첫 사업으로 1931년 2월 25일에는 경운동 천도교기념관에서 여자체육의 찬미와 조선’ ‘조선여자체육장려회의 사명’ ‘조선여자와 체육’ ‘아동의 건강과 여자체육’이란 주제로 체육강연회를 열었다.

1933년 4월 27일에는 김활란을 신임 회장으로 맞으면서 조직을 정비해 상무간사에 서은숙, 김신실, 이사에 방겸순, 박마리아 등이 참여했다. 그 뒤 6월 24일에는 종로 청년회관에서 58명이 참가해 제1회 전조선여자탁구대회를 개최하는 등 체육 활동을 학교에서 가정으로 확대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일반 여성들을 위한 체육 활동도 적극적으로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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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대학원에서 체육학 석사학위를 받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전문체육인 김신실은 여화여전 교수로 재직하면서 각종 근대스포츠를 소개하고 레크레이션 기술을 지도했다.
여성전문체육인 등장과 활동
여성들의 스포츠단체에서의 활동은 남성들에 견주어 미약했다. 1920년 7월 13일 조선체육회 창립 발기인이 90여 명에 이르지만 여성은 단 한명도 없었다. 이는 여학교들이 대거 설립되고 체육이 정식교과 과목으로 채택이 되었지만 수어을 하는 교사가 남성인데다 남성중심의 가부장 사회가 여전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러다가 1923년에 시작한 전조선여자정구대회가 자리를 잡으면서 여기에 출전했던 여자 선수들이 뒤에 심판이나 지도자로 참여,남성중심의 스포츠 문화 속에서 여성 스포츠 발전의 맥을 이었다..

이런 가운데 1930년 미국 오벌린 여고를 거쳐 오벌린 대학을 졸업한 뒤 미시간대학 대학원에서 우리나라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체육학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김신실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체육전문가였다. 이화여전에서 체육을 담당한 그녀는 6인제 여자농구, 하이킹, 사이클, 하키 등 근대스포츠를 소개하고 레크레이선에 관한 기술을 지도했다, 특히 운동과 유희에 관한 지침서인 ‘유희지침’을 최초로 1933년에 발간해 모든 유희를 분류, 정리하고 운동과 유희는 건강과 덕성을 증진시키거 쾌활한 정신과 사교적, 협동적 정신까지 주며 우리의 생활을 윤택하게 한다고 강조했다.

이밖에 평양 출신으로 유명 육상선수인 강복신은 도쿄 니카이도 여자체육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동덕고녀에서 교편을 잡다가 1939년 손기정과 결혼해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또 이화여전의 정구선수로 활약하다 1932년 도쿄 여자체육전문학교로 체육유학을 떠나 1935년 귀국해 제13회 전조선여자정구대회에 심판으로 참여하면서 지도자 길을 걸은 김옥례는 조선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유교사상, 여성스포츠에 대한 이해 부족, 여성체육지도자의 부재 등의 한국여성 스포츠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외국 스포츠의 폭넓은 수용, 여성 스스로 남존여비의 봉건사상 탈피, 체육댄스의 보급과 조선 고유 전통놀이의 현대화를 제안하기도 했다.

이들 이외에도 송금령, 조은경, 신보석, 임덕순, 김복림, 최이순, 서명학, 방순경, 박현옥, 김현숙 등도 여성체육을 선도하는 지도자, 선수 생활을 거쳐 심판 등으로 활동하며 근대스포츠 보급에 힘쓴 ‘인텔리, 신식 여성’들이었다.

[정태화 마니아리포트 기자/cth08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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