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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스포츠 100년](8) 신여성의 스포츠활동(상)

2020-03-14 11:18

1920년 경기여고 여학생들의 배구 경기 모습. 흰띠를 머리에 동여맨 댕기머리 여학생들의 모습이 이채롭다.〈사진으로보는 경기여고 100녀사에서〉
1920년 경기여고 여학생들의 배구 경기 모습. 흰띠를 머리에 동여맨 댕기머리 여학생들의 모습이 이채롭다.〈사진으로보는 경기여고 100녀사에서〉
근대화와 여성의 역할 변화
우리나라에 개화기의 물결이 밀려들기 전 여성의 체육 활동은 사실상 전혀 없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명절에 주로 하는 널뛰기, 그네뛰기, 윷놀이, 투호 등 민속놀이들이 있었지만 이것들은 체육이라고 이름을 붙이기보다는 유희나 오락에 가까웠다. 이는 신체활동을 천시하는 전통적인 유교사상에 기인한 바가 컸다. 즉 이때까지 여성들은 전통적 유교적 가부장제에서 부덕(婦德·여자가 지녀야 할 덕행)을 지킬 것을 강요받았다. 무엇보다 조선이 근대화를 시작하기 직전은 유교적 가부장제가 가장 심했던 시기였다. 이러한 남성중심의 조선에서는 남성의 역할과 권한이 더욱 확대된데 견주어 여성은 남녀칠세부동석, 내외, 삼종지도, 칠거지악 등 갖가지 족쇄에 갇혀 살았다.

이런 과정에서 비록 자의가 아닌 타의였지만 문호가 개방돼 서구의 신식 문물이 물밀 듯이 들어오면서 조선 사회 전반에 몰고 온 큰 변화의 한쪽에는 여성에 대한 인식 변화도 있었다. 개화사상의 도입에 때맞춰 고종이 1895년 2월 남녀평등과 학문의 기회균등을 천명한 교육조서를 발표하면서 봉건적 여성관이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보다 앞서 급진개화파로 1884년 갑오개혁을 주도했던 박영효는 1888년 개화에 대한 상소문에서 법률과 관습에 나타난 남녀 불평등을 지적하면서 개가허가, 축첩제 폐지, 여성교육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이는 허공속의 메아리였다.

결국 개화사상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면서 여성 역할에 대한 인식이 변화 조짐을 보이기는 했지만 한순간에 달라지지는 않았다. 변화를 시도하는 과정의 첫발을 조심스럽게 떼었을 뿐이었다. 문호 개방 이후 가장 시급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풍전등화와 같은 국가위기를 개화사상을 통해 극복하고 서구 열강과 같은 자주국가 수립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근대식 교육이 필요했고 근대식 교육을 위해서는 이를 담당할 학교와 교사가 필요했다. 이런 와중에 1884년 개신교 선교사들의 입국은 이 땅에 신식학교와 신식 교육, 그리고 신식체육의 뿌리를 내리는 자양분 역할을 했다.

특히 1886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시작으로 전국에 여학교들이 들어서면서 여성에게도 신식교육이 실시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체력배양이 지름길이라며 남자학교들이 처음부터 체조를 정규 교과목으로 채택한 것과는 달리 여학교들이 체조를 교과목으로 채택하기까지에는 거의 6년이나 지나야 했다. 여성들에게 남녀평등, 균등한 교육기회를 강조했지만 이화학당이 1886년 5월 31일 단 한명의 학생으로 시작해 그해 10월 4명으로 늘어나고 그해 말에는 겨우 7명밖에 되지 않았던 것만 보아도 여성들이 사회생활을 하기에는 여전히 제약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어려움 가운데 신여성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여성 스포츠의 역사는 여학교에서
신여성의 스포츠 활동은 여학교의 역사와 맞물려 있다. 조선이 근대화하기 시작해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광복이 될 때까지 ‘여학교’라고 하면 ‘여자고등보통학교’, 즉 ‘여고보’를 이야기 하는 것으로 보통학교를 졸업한 여학생들이 진학한 중등교육기관을 말한다. 조선 사회에서는 꿈도 꾸기 어려웠던 모든 여자들에 대한 보편적인 교육은 신문물 습득으로 여성들의 민족주의 정신을 일깨웠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 여성 해방운동, 여성 인권 신장의 촉매제가 되기도 했다.

1886년 5월 31일 우리나라 첫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이 설립된 이후 1890년대와 1900년대 초까지 사립학교와 기독교계 전국 여학교들은 폭발적으로 늘어나 1905년에는 170여 개교에 달할 정도였다. 일제가 1911년 사립학교령을 공표해 교육체제 통제를 시작하면서 폐교와 휴교가 늘어났지만 서울을 비롯한 부산, 대구, 광주, 전주, 평양 등에는 지역을 대표할 만한 여학교들이 건재했다.


당시 기독교계 여학교들은 서울에 이화(1886년), 정신(1886년), 배화(1898년)를 비롯해 인천에 영화(1892년·현 영화초등학교), 개성에 개성여학당(1899년·현 호수돈의 전신), 전주에 기전(1903년), 평양에 숭의(1903년), 함흥에 영생(1903년), 대구에 신명(1907년), 광주에 수피아(1908년) 등이었다.

사립학교로는 서울에 진명(1896년)과 엄황귀비의 지원으로 설립한 명신여학교(1906년·현 숙명여자고등학교)가 있었다. 1908년 4월 1일 한성여학교(현 경기여자고등학교)는 처음으로 국가에서 설립한 여학교였으며 천도교 교주인 손병희가 학교 재정을 부담한 동덕여고보(1908년·현 동덕여자중고등학교)는 보성학교와 더불어 기독교계가 대다수를 이루던 사립학교들 가운데 독특하게 천도교계 학교였다.

바로 이러한 여학교들에서 체조가 정식교과 과목으로 채택되면서 여성체육도 조금씩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사회의 통념으로 여성들이 교육을 받는 것 자체만으로도 전통과 구습을 타파하는 일대 혁신이었는데 여기에 여성체육, 즉 체조가 정식 교과과정으로 받아들이기까지에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이 바람에 가장 먼저 체조를 시작한 이화학당조차도 1892년 이전의 교과과정에서는 체육과 관련된 과목이 없다가 조세핀 페인(J. O. Paine)이 1893년 9월에 제3대 학당장으로 취임하면서 겨우 시작했다. 몸집이 뚱뚱하고 엄격해 학생들이 ‘아버지’라는 별명으로 불렀던 페인 학당장은 탁월한 행정적 수완과 재능으로 1907년 5월까지 14년 동안 학교 발전에 헌신했는데 체육사적으로는 교과과정에 체조 과목을 넣어 여자에게도 체육을 가르치게 한 것이 큰 업적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1886년 우리나라에서 여성 교육기관으로 처음으로 설립된 이화학당의 1896년 체조 수업 모습, 오른쪽이 지도교사인 월터 선생이다.
1886년 우리나라에서 여성 교육기관으로 처음으로 설립된 이화학당의 1896년 체조 수업 모습, 오른쪽이 지도교사인 월터 선생이다.

체조 처음 실시한 이화학당

이화학당이 개교를 한지 어언 7년. 페인 학당장이 부임하면서 시작된 체조는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큰 사건이었다. 개화 초기에 체육은 신교육을 받은 일부 제한된 계층에서만 성행했을 뿐 대부분의 계층, 특히 양반들은 운동에 대해 경시하는 풍조가 여전했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여성들이 체육을 한다는 것 자체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고 일부 여성들도 스스로 봉건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체육을 육체적 활동으로만 여겨 기피하거나 배척하기도 했다. 이 바람에 양반집에서는 이화학당을 나온 여성들은 며느리로 들이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페인이 학당장으로 취임하면서 체조과목을 시작했을 때 큰 소동이 벌어졌다. 부녀자들은 걸을 때 손을 흔들기를 마음으로만 하고, 발을 뗄 때 발바닥보다 더 내딛지 못하도록 가르침을 받았고, 고개를 돌릴 때도 몸과 함께 돌리며, 앉을 때는 오금과 발목을 번갈아 가며 서서히 좁혀 앉으라고 가르침을 받았다. 즉 행동은 곧 부덕이며, 생명체를 움직이는 데 최소한으로 행동을 제한시켰던 것이다. 숨 쉬는 목석이 바로 부녀자의 이상상이라고나 할까. 이러한 시절에 손을 내어 흔들고 가랑이를 벌리며 달음질을 시키는 체조를 가르쳤으니 반대 여론이 들끓지 않을 수 없었다. 학부형들은 딸을 데려 가겠다고 학교 문안으로 들어 닥치고 한성부에서는 체조를 없애라는 공문이 계속 날아들었다. 페인 학당장은 이러한 물의에 굴복하지 않고 대담하게 체조를 강행하였다.”(이화 80년사에서)

이화학당의 체조 교육은 여자들의 복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1900년경까지 외출할 때 여자들의 옷차림은 얼굴을 가리기 위하여 장옷과 쓰개치마를 쓰는 일이 통례였다. 이화학당은 설립초기부터 스크랜튼 학당장이 다홍색 긴 치마와 같은 색의 짧은 저고리를 입게 했다. 붉은 교복을 입은 이화학당의 소녀들을 ‘홍동이’라고 불렀는데 붉은 교복의 불편함을 개량한 것이 ‘통치마’였고 1911년 월터는 체조 시간에 저고리가 가슴을 꽉 조이는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 ‘어깨허리치마’(조끼허리치마)를 고안해 입게 하였다. 개량한복의 시초인 셈이다. 또 처녀들은 머리를 길게 길러 허리까지 치렁치렁하게 늘인 것이 자랑이었는데 조회시간이나 체조를 할 때는 불편해서 흰 리본이나 빨간 리본으로 머리를 매게 하였다. 신발은 짚신, 미투리였고 비가 올 때는 나막신을 신었다.

이렇게 이화학당에서 첫 체조를 가르치기 시작한 뒤 1887년 설립된 정신여학교는 신체의 부분 운동과 전체 운동, 그리고 기구를 가지고 율동도 하는 교육을 실시했다. 배재학당 교사였던 존스의 부인 뱅겔이 1892년 4월 30일 인천 제물포에 설립한 영화여학당은 체육교사 마커가 부임해 체조를 가르쳤다. 그는 체조 시간이면 짤막한 막대기를 들고 나와 구령을 붙이며 ‘줄을 똑바르게 서는 법’, ‘발을 맞춰서 운동장을 도는 법’, ‘팔운동’, ‘허리운동’, ‘가슴운동’, ‘머리운동’ 등을 한 줄로 서서 실시했다.

캠벨 여선교사가 1898년에 설립한 배화학당에서는 매일 오후 수업이 끝난 다음에 전 교직원과 학생이 모여 체육활동을 했으며 엄황귀비가 명신여학교란 이름으로 설립한 숙명여고보는 개교 당시부터 체육에 관심을 갖고 그네, 체조, 유희(무용), 터치볼 등의 종목을 가르쳤다.

결국 우리나라 신여성의 스포츠활동은 이화학당의 체조를 시작으로 점차 여학교들로 퍼져 나가 근대 여성체육의 모태가 됐다. 한참 뒤의 일이기는 하지만 이화학당은 1936년 10월 24일 운동회에서는 전교생 체조, 교수 릴레이, 학생경기와 배드민턴과 같은 경기종목이 있었고 1938년에는 우리나라의 전통무예인 궁술을 정식 교과과정으로 채택하기도 했다.

[정태화 마니아리포트 기자/cth08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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