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

[INTERVIEWEE] "55세까지 투어에서 활동하고 두자릿수 우승하고 싶다" 이원준

2019-07-31 08:00

'골프 신동'이었지만 프로 데뷔 이후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다가 투어 생활 13년째인 올해 한국프로골프(KPGA) 코리안투어 KPGA선수권에서 첫 승을 만든 이원준(34세).

인터뷰 첫 편에서 그는 "그동안 어깨에 지구를 얹은 느낌"이라고 했었다. 인터뷰 초반에는 그 답에 대한 울림이 그렇게 크지 않았다. 하지만 질문과 답이 계속되면서 그가 느꼈을 상대적인 빈곤의 크기를 가늠하게 됐다고 했다. 이번에는 그가 골프를 시작하고 첫 우승을 하기까지 일어났던 중요한 장면 위주로 질문과 답변 형태로 묶어 정리했다.

자, 이원준의 두 번째 인터뷰를 시작한다.

골프를 처음 시작할 때(좌), 호주 국가대표 시절의 이원준. 사진 제공=이원준.
골프를 처음 시작할 때(좌), 호주 국가대표 시절의 이원준. 사진 제공=이원준.
열다섯 살에 골프를 시작했다고 들었다.
아버지가 운동 선수로 키우려고 했다. 호주 유학 하자마자 축구부에 들어갔는데 1년도 못하고 포기했다. 이후 테니스, 수영, 유도, 태권도, 럭비, 야구도 했는데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혼자 농구를 시작했다. 재미 있었고 열심히 했다. 하지만 농구는 아버지가 반대했다. 아버지가 조기 축구를 그만두고 골프를 시작할 무렵에는 '골프 할래?’라고 물었고 나는 ‘그걸 왜 해요?’ 했다. 난 단체 종목을 좋아했고 골프는 프로 운동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가 농구를 열심히 하니 '농구를 하고 싶으면 골프를 하라'고 하셨다. 어느 순간 골프를 농구보다 더 잘하게 됐는데 농구하다가 손가락이 부러지고 다치고 오니까 '이제 농구는 그만두라'고 하셨다. 그 때 슬펐지만 고민을 시작했다. 농구는 미련이 있었는데 만약 키가 더 안 크고(지금 190cm의 키는 고등학교 2학년 때와 같다) 100% 다른 선수에 비해 느릴건데, 그러면 실력이 훨씬 좋아야 하는데, 그건 아닐 것 같았다. 농구 선수는 그 때 머릿속에서 없어졌다.

농구가 그렇게 재미있었나?
지금도 농구가 더 재미있다. 보는 것부터 하는 것까지 정말 재미있다. 골프도 재미 없지는 않다. 하지만 골프는 내 길이다. 열심히 할 수밖에 없다. 싫든 좋든 해야할 운동이다. 갤러리는 선수가 골프가 재미 있어서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100%는 아닌 것 같다. 잘 해서 하는 선수도 있고, 나도 골프 쪽에 재능이 더 있다. 인생에서 좋아하는 일만 할 수는 없다. 잘 하는 것을 해야지. 그걸 빨리 받아들였다. 좋아하는 것은 농구, 잘 하는 것은 골프. 골프 연습은 재미 없지만 대회 출전은 스릴이 있다. 한타 한타 타수에 대해 욕심이 많아서 ‘쫄리는 맛’이 너무 즐겁다.

아마추어 세계 랭킹 1위였다. 당시 라이벌은 누구였는가?
제이슨 데이(투어 12승). 같은 호주 대표였다. 나보다 한 해 위는 마크 리시먼(투어 통산 9승). 미국에서는 웹 심슨(투어 5승), 게리 우드랜드(투어 4승, 올해 US오픈 우승). 더스틴 존슨(투어 21승)은 나보다 프로 전향이 조금 빨랐다. 영국에서는 로리 매킬로이(투어 25승)가 아마추어 대회에 많이 나왔다. 프로 전향 즈음 '그들보나 더 잘 쳤는데 왜 안될까'라는 압박을 많이 받았다. 아마추어 때보다 실력은 더 좋은데 성적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갈수록 실력도 떨어지는 것 같고. 그래서 우울한 시절이 꽤 있었다.
2005년 일본오픈 아마추어 1위(좌), 2006년 웨스틴아마추어챔피언십 메달리스트를 차지했다.
2005년 일본오픈 아마추어 1위(좌), 2006년 웨스틴아마추어챔피언십 메달리스트를 차지했다.
미국PGA 2부투어에서 5년을 보냈다. 1부로 올라가지 못한 원인이나 이유? 4라운드 다 잘 치지 못했다. 어느 대회든 한 라운드를 잘 못 쳤다. 못 치는 라운드가 1언더파 정도 됐어도 괜찮았을텐데 1~2오버파였다. 결과적으로 한 라운드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잘 치고 싶어서, 꼭 해야한다, 이런 걸 못 이겨서 스스로 망친 플레이가 있었던 것 같다. 첫 해는 괜찮았지만 2~3년 지나면서 더 쌓였다. KPGA선수권(파70)에서도 마지막 라운드에 오버파를 쳤지만(62-64-68-71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일요일에 날씨가 좋아서 누군가 7~8언더파는 나올 것으로 예상했고 나는 3~4언더파를 쳐야 우승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운 좋게 올라온 선수들이 없었다.

2012년에 오른쪽 손목의 연골이 거의 닳아 골프를 할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신체적으로 뼈가 길다. 왼손은 괜찮았는데 오른손이 문제였다. 볼을 많이 치다 보니 자연스럽게 동작이 안되고 연골을 갈아냈다. 어렸을 때부터 아팠다. 머리를 감지 못하고 손목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다. 수술은 하지 않고 물리 치료를 받았다. 많이 좋아졌다. 질문처럼 '연습을 많이 해서'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신체적인 문제가 컸다.


그래서 부상으로 2년 여를 쉬었다.
그 때 너무 다른 생활을 했다.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집중해 공부를 했다. 그런데 안되더라. 머리 속에 안 들어왔다. 외워지지도 않고, 재미도 없고, 하고 싶은 과도 고르지 못하고. 나는 공부를 골프하고 똑같이 생각했다. 연습하면 되는 줄 알았다. 2년동안 공부를 하면서 학교와 집을 반복해서 다녔고 친구도 직장이 있어서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몸은 굉장히 편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연습하는 것이 없어지니 몸이 좋아졌다.

'친구의 권유로 골프 클럽을 다시 잡았다'고 했다.
친구가 볼링을 치자고 했다. 손목이 괜찮았다. 그 친구가 골프를 좋아해서 '다음 주에 골프 할래' 물었고 2년을 쉬었는데 이븐파를 쳤다. 생각보다 볼이 잘 맞았고 아프지 않았다. 그래서 이틀동안 고민을 했다. 대학 다니고 졸업하고 직업 찾으려면 시간이 꽤 지나간다. 골프는 아직도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퀄리파잉(Q)스쿨을 어디를 신청할까? 미국은 가고 싶지 않았다. 5년동안 쌓인 게 많아 다른 투어에서 시작하고 싶어서 일본에 갔다.
미국PGA투어에서 활동할 때의 이원준. 우측은 제임스 한.
미국PGA투어에서 활동할 때의 이원준. 우측은 제임스 한.
2014년 일본(JGTO) Q스쿨을 통해 2015년 출전권을 얻었다. 일본투어를 선택한 이유?
프로 데뷔한 곳이 일본이다. 3개 대회에 초청을 받았었다. 비자마스터스, 던롭피닉스, 카시오월드오픈이었다. 일본에 대한 기억이 좋았다. 호주와 시간도 비슷하고 한국에서 한번 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Q스쿨 통과하고 바로 한국에 왔다. 호주에 있는 골프장 멤버 중 한 명이 일본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일본 얘기를 많이 했었다. 권유도 있었고, 괜찮을 것 같았다. 미국은 안 좋은 추억이 너무 많았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특히 2부투어를 통해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2017년 상반기에 허리 디스크가 생겼다고 했다.
허리 디스크가 터졌다. 재활 받고 괜찮아지다 또 터지고, 또 터지고. 시술을 했는데 큰 수술은 아니어서 결과적으로는 좋아졌다. 가끔씩 아프고, 그래서 체중도 불렸다. 한동안 허리에 대한 자신감이 많이 떨어졌다. 지금도 자신감은 100% 있지 않다. 시간이 흐르면서 좀 더 허리에 자신감이 생기면 체력 단련도 더 하고 좀 더 볼을 세게 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80%. 가끔 아프고 쑤시지만 볼을 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혹시 장타가 부상의 원인은 아니었나?
조금은 있다. 어렸을 때 스윙을 배웠을 때 완벽하지 않았었다. 잘못된 움직임이 많았고, 일단 거리를 최대한 보내게끔 몸을 꼬고 하는 동작이 심하다 보니 서서히 시간이 지나면서 허리에 안 좋아진 면이 많았던 것 같다.
올해 10월 미국PGA투어 CJ컵에 출전한다.
올해 10월 미국PGA투어 CJ컵에 출전한다.
오는 10월 미국PGA투어 CJ컵에 출전한다.
큰 대회 출전은 2007년 브리티시오픈이 마지막이었다(공동 49위). 12년만에 PGA 대회에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너무 기쁘고, 기대보다는 열심히 쳐야된다는 생각 밖에 안 든다. 좋은 기회가 주어졌으니 최대한 플레이를 잘 할 수 있게, 성적은 좋게 나오면 좋겠지만 모든 선수가 그 주의 감각을 컨트롤 할 수는 없다. 연습을 많이 해도 못 칠 수도 있다. 그래서 최대한 잘 칠 수 있는 방향으로 보려한다.

미국PGA투어 진출을 노린다고 했다. 여전히 유효한가?
꿈은 접지 않았다. 내가 탁구를 잘 못 한다. 그런데 탁구 선수와 게임을 붙여놓아도 이기고 싶은 욕심은 세다. 그래서 아직까지는 미국PGA투어에 가고 싶은 욕심도 많고 와이프하고는 아직도 얘기를 한다. 일본투어를 하면서도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지만 골프를 할 때 일본투어에서 은퇴할 생각이 아니었다. 꼭 미국PGA투어에 가고 이름도 남길 수 있는 선수가 되고 싶다.

오랜 시간동안 타이틀리스트가 지원해 온 것으로 안다.
골프를 처음 시작했을 때 아버지가 타이틀리스트 풀 세트를 물려주었다. 그리고 싱글 핸디캡이 되면 새로운 클럽을 사준다고 했다. 나는 아직도 내 첫 세트를 기억한다. 타이틀리스트 990B였다. 아이언. 그 세트를 미국에서 주문했다. 드라이버, 우드, 웨지, 퍼터 등 다 타이틀리스트로 샀다. 어렸을 때부터 타이틀리스트 마니아였다. 호주는 주니어 때 볼을 잘 치면 후원을 해준다. 2003년부터 타이틀리스트로부터 후원을 받았다. 볼, 장갑, 모자 등등. 너무 기쁘고 행복했다. 프로 전향 하고 나서 시드 따기 전 타이틀리스트에서 후원할 마음이 있다고 했다. 감사했다. 나는 외국인이지만 ‘의리’에 대해 깊게 생각한다. 내가 자신 있게 플레이 할 수 있는 클럽도 타이틀리스트이고, 다른 회사에서 돈을 조금 더 주겠다고 해도 내가 마음에 드는 용품을 사용해 상금을 더 벌 수 있다. 타이틀리스트와 나는 기회만 된다면 평생 가고 싶다.
병원에서 데이트를 했던 이원준. 결국 지난해 12월 결혼했다.
병원에서 데이트를 했던 이원준. 결국 지난해 12월 결혼했다.
여기까지가 이원준이 골프를 시작해서 첫 승을 거둔 이후 가장 최근까지의 근황이다.

이원준에게는 결혼이 상황과 생각에 변화를 준 결정적인 매개였던 것같다. 그는 지난해 12월 결혼을 했고 오는 10월이면 자녀도 생긴다. 그는 결혼해서 좋은 점에 대해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해 확실하게 계획이 잡힌 것 같다"고 했다. "부모님과 살 때는 나쁘게 표현하면 '막 살아도' 됐다. 골프는 대회 이외에는 자신의 스케줄을 만들기 때문에 특별히 책임져야 할 게 없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가정도 있고 아이도 생기고 하니, 처음에는 올해만 잘 쳐야지 하고 그것 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아이를 대학도 보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아, 좀 더 열심히 해야겠다', '계획적으로 좀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아이를 골프 선수로 키울 생각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원한다면 굳이 안된다는 말은 못할 것같다'고 전제를 달기는 했다.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은 부모님처럼 할 수 없기 때문'으로 읽혔다.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대단하다. 나는 그렇게 못할 것 같다. 어떻게 그렇게 잠 없이 일을 하면서 여동생과 나 둘을 돌 볼 수 있었을까. 내가 봐도 시간이 없었는데"라면서 "나는 못할 것 같다"고 했다.

이원준에게 '7월 하순 현재 프로 투어에서 총 12시즌동안 244게임을 소화했다'고 알려주었더니 "내 느낌에는 더 친 것 같다. 한 500게임"이라는 답을 돌려주었다. 그는 "더 치면 좋겠다. 생각대로 된다면 PGA투어에서 50세까지, 그리고 시니어투어에서 5년을 더 보낸 후, 딱 55세에 은퇴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아무리 못해도 10승은 하고 싶다. 두 자리까지는 가고 싶다"는 속내를 내비쳤다.

8월 말 그는 일본에서 하반기를 시작한다. 더는 부상 없이,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란다.

[노수성 마니아리포트 기자/cool1872@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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