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민은 책에 쓰여진 대로 그들에게 치매 환자 대하듯이 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과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해야 한다고 느낀 것이다. 일주일에 하루를 온전히 아이들과 보내면서 조금이나마 그들의 삶을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일반적인 증상 외에 연기에 아이들의 특성을 참고하거나 흉내내서는 안된다는 원칙도 마음에 심었다.
그는 연기를 못하는 배우가 아니다. 오히려 잘하는 축에 속한다. 그 말인 즉슨, 다큐멘터리 같은 영상 자료를 보고 자폐증을 가진 이들의 몸짓이나 말투를 얼마든지 답습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럼에도 박정민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그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저 흉내가 아닌 삶 속에서 알아가기를 택한 탓이다.
다음은 박정민과의 일문일답.
▶ 이번 영화를 준비하면서 학교로 봉사활동을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계기로 참여하게 된 건지 궁금하다.
- 오진태를 연기하는 박정민이 보여줄 수 있는 한 가지 진심이 무엇일지 계속 생각하다가 봉사활동을 해보자 싶었다. 고민이 많았다. 외부인이 어느 날 갑자기 연기하겠다는 식으로 교실에 들어와서 누군가를 관찰하고 이런 것 자체가 무례한 일일 수도 있지 않나. 그렇게 2~3주 고민을 하다가 학교에 내 직업을 밝히고 전화를 걸었다. 자원봉사를 해도 될까요, 물었더니 너무 좋아하시는 거다. 학급에 정말 인력이 많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7교시를 전부 다 하겠다고 하니까 선생님이 놀라시더라. 그 때는 왜 그런가 싶었는데 아이들 대하는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 연기 때문에 간 것은 아니지만 무의식 중에 아이들의 사소한 습관이나 이런 것들이 연기에 녹아들 수도 있었겠다.
- 아이들을 보며 집에 가서 연습도 하고 그랬는데 어느 날 선생님이 내게 혹여나 말씀드리지만 우리 반에 있는 아이들의 특성을 따라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셨었다. 누가 봐도 어떤 아이의 특성인지 보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더라. 그 때 나도 '아차' 싶었다. 그래서 책과 영상을 보며 그들이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특징들을 관객들에게 소개해주고, 진태로서 가져가는 걸 창조해서 만들어냈다.
▶ 해당 학급의 아이들과는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관계를 맺어갔는지 궁금하다.
- 일단 자폐를 가진 분들과 그 가족 분들 그리고 복지사 분들, 그런 분들이 영화를 볼 때 불쾌하지 않아야겠다는 게 첫 번째 원칙이었다. 5명 친구들에게 그 전 주에는 똑같이 '뭐했어', '밥 먹었어?' 이러다가 내 친구로, 친한 동생으로 대해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게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내 말을 이해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농담을 하니까 아이가 씩 웃더라. 그렇게 평범하게 대한 순간, 아이가 스스로 존중받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내게도 진태를 연기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그들을 존중해나가는 또 하나의 과정이구나 싶었다.
▶ 필모그래피를 보면 쉬운 영화가 하나도 없었다. 일부러 그렇게 공을 많이 들여야 하는 작업을 찾아서 하는 편인가.
- 계속 그런 걸 하니까 그냥 팔자라고 생각한다. 그런 작품들을 만나면 아주 큰 장점으로는 기술이 생긴다는 거다. '전설의 주먹'을 찍고 복싱이 재미있어서 몇 년을 했으니까 아마 액션씬이 있으면 크게 훈련하지 않아도 해낼 수 있을 거고, 피아노도 집에서 계이름 적어가며 연주하는 취미가 생겼다. '변산' 같은 경우도 래퍼니까 거기에 나오는 노래 가사들 중에 상당 부분을 제가 썼다.
▶ 그렇게까지 본인이 힘든 작업을 해낼 수 있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 마음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라는 불안감. 그게 나를 갉아먹는 것일 수도 있는데 그거 때문에 소파에서 일어난다. 나는 좀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성향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칭찬을 들으면 자신감이 생기지만 내 안에는 '웃기지마. 언젠가는 들통나게 돼 있어'라는 마음이 크다. 그러니까 안심하지 말라는 마음이 내 안에 있다. 나이가 서른이 넘었어도 뭔가 정립된 것이 아니라 항상 흔들리니까 내 또래 배우들도 주변에 보면 비슷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 그렇게 치열하게 일한 후에 또 재충전의 시간이 없으면 안될 것 같다.
- 친한 배우들이 있다. 배성우 형, 이제훈 형, 류덕환, 뭐 그런 친구들 만나서 술 마신다든지 한다. 아니면 집에서 운다든지, 힘든 운동을 한다든지 하루 동안 미친 척하고 한 가지 일만 해본다든지, 여행을 다녀온다든지 털어내고 다시 시작하는 거다. 그러다가 내가 뭐하는거지 하는 마음이 들어야 다시 돌아가니까. 최근에는 피아노가 도움이 되더라. 한 곡을 치다 보면 어느 새 두 세 시간이 훌쩍 가 있다. 요즘에는 그림도 많이 그린다. 가까운 형들 얼굴 그려서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연하장도 드렸다. 이병헌 선배는 '그림도 잘 그리니?' 이렇게 답을 주시더라. (웃음) 재능은 없고 욕심만 있어서 이것 저것 한다. 어차피 세상에 보여줄 게 아니고 나 혼자하는 거니까 재미있다.
▶ 원래 감정 표현에 솔직하고 눈물이 많은 편인지, 아니면 최근에 와서 늘게 된 것인지 궁금하다.
- 그러게. 눈물이 많이 없는데 요즘에 약간 그렇다. 복합적인 마음인 것 같다. 나는 이 일을 좋아했던 사람인데 어느 순간 일에 치이고 있어서 슬플 때도 있고…. 그렇게 울어버리면 털어지는 게 또 있더라. 예전에는 끝까지 참고 울지도 못했다.
CBS노컷뉴스 유원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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