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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영의 마니아썰]한국 남자골프와 유목민

2016-05-11 12:18

▲자의반타의반으로해외에진출했던한국남자선수들이최근승전보를잇따라날리고있다.그들의유목민적인도전정신은성공신화로이어지고있다.사진은해외에서활약하고있는이수민,장동규,안병훈,왕정훈,그리고노승열(왼쪽부터).사진편집=박태성기자
▲자의반타의반으로해외에진출했던한국남자선수들이최근승전보를잇따라날리고있다.그들의유목민적인도전정신은성공신화로이어지고있다.사진은해외에서활약하고있는이수민,장동규,안병훈,왕정훈,그리고노승열(왼쪽부터).사진편집=박태성기자
세계사를 보면 대체로 유목 민족이 정착 민족을 정복했다. 몽골이 대표적이다. 그들의 영토는 아시아는 물론 동유럽까지 방대했다. 그들은 척박한 땅에서 농경을 제대로 할 수 없었기에 한 곳에 안주할 수 없었고, 그래서 정복에 나섰으리라.

최근 몇 년 사이 국내 무대가 척박해진 한국 남자 골프도 점차 노마드(유목민) 양상을 보이고 있다. 과거에는 국내와 일본이 주무대였고, 최경주, 양용은을 비롯한 몇몇 정상급 선수들만이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에서 활약했지만 몇 년 사이 유럽까지 무대를 넓혔다. 이수민과 왕정훈이 잇따라 승전보를 전하는 등 가시적인 성과도 있다.

과거와의 뚜렷한 차이는 출발선이다. 예전에는 국내 무대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뒤 이를 발판 삼아 해외로 진출하는 게 정석이었다. 지금은 아예 주니어 시절부터 해외 투어에서 시작하는 선수들이 늘고 있다. 골프를 익히기에 해외 여건이 더욱 좋은 데다 다양한 경험이 성장에 필요한 훌륭한 밑거름이 된다는 걸 알아서다.

지난 9일 유럽프로골프(EPGA) 투어 하산 2세 트로피에서 우승한 왕정훈이 그런 케이스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골프채를 잡은 그는 골프 입문 3년 뒤 필리핀으로 떠났다. 6년을 그곳에서 지내면서 필리핀 아마추어 챔피언십을 제패했고, 만 16세 때인 2012년 프로로 전향했다. 그해 중국프로골프(CPGA) 투어 퀄리파잉(Q)스쿨을 통과하더니 곧바로 상금왕에 올랐다.

왕정훈은 이듬해에는 아시안 투어로 눈을 돌렸고, 올해 1월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유라시아컵에 아시아를 대표하는 선수로 선발됐다. 당시 24명의 선수 중 최연소였다. 해외를 떠돌던 그는 지난해 드디어 고향에 발을 붙이게 됐다. 지난해 한국프로골프(KPGA) 투어에 세 차례 출전했는데 SK텔레콤 오픈과 한국오픈에서 공동 3위에 오르며 상금 상위 자격으로 올해 KPGA 시드를 보유하게 된 것이다.

지난해 KPGA 선수권에서 국내 72홀 최다 언더파 기록을 깨며 우승을 차지한 장동규도 ‘골프 유목민’에 속한다. 그는 중학교 때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골프 유학을 다녀온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곳에서 혼자서 골프와 학업을 병행했다. 2008년 한국프로골프 투어 선수가 됐지만 2011년 일본 Q스쿨을 통과해 2012년부터 5년 째 2개 투어를 병행하고 있다.

지난해 유럽의 BMW PGA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안병훈도 2012년부터 3년간 유럽 2부 투어를 경험했다. EPGA 투어의 무대는 아시아는 물론 아프리카까지 방대하다. 2부 투어는 더구나 작은 마을에서 열릴 때가 많다.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등도 있었다. 그런 곳에서 그는 샷을 가다듬었다.

2010년 브리티시 아마추어 챔피언십 우승자 자격으로 참가한 디 오픈에서 공동 14위에 올랐던 정연진도 국내 무대를 건너뛰고 유럽부터 시작했다. 2011년부터 유럽 2부 투어를 전전하던 그는 2013년 ISPS 한다 퍼스 인터내셔널에서 깜짝 우승했다. 이후 슬럼프를 겪고 있지만 다시 한 번 유럽에서 재기를 노리고 있다.

국내에서 주니어 시절을 보냈더라도 KPGA 투어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해외 투어부터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미국에서 활약 중인 노승열도 아시안 투어부터 시작해 지금의 자리까지 왔다. 김시우도 곧바로 미국 문을 두드린 케이스다. 그는 2012년 PGA 투어 Q스쿨에 최연소로 합격했지만 ‘18세 입회 규정’으로 인해 2013년 투어에 제대로 나서지 못하고 3년 간 2부 투어를 전전한 끝에 올해 PGA 투어에 복귀했다. 황중곤은 국내 시드전에서 떨어진 뒤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3승을 올리며 이름을 알린 선수다.

미국, 일본, 아시아, 유럽 뿐 아니라 최근에는 차이나 투어도 젊은 선수들로부터 각광을 받고 있다. 차이나 투어의 실력은 아직 국내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상금랭킹 상위 3위 이내에 오르면 PGA 2부 투어 격인 웹닷컴 투어 시드가 주어지는 메리트가 있다. 또한 일본과 마찬가지로 지리적으로 가까워 국내 투어와 병행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타이틀리스트에서 선수 지원을 담당하고 있는 서동주 팀장에 따르면 현재 20명 이상의 선수가 중국 대륙을 누비고 있다.

골프는 스코틀랜드의 양치기 목동들이 심심풀이로 하던 운동에서 유래됐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광활하고 거친 벌판에서 이뤄졌다. 그 안에서 이뤄지는 샷의 경연은 다양하고, 창조적이다. 한국 남자 골프도 지금 거친 광야에 내 몰려 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해외로 나간 선수들은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며 하나 둘 성공 신화를 쓰고 있다.

이런 남자 선수들의 활약에 힘입어 등을 돌렸던 국내 팬들도 점차 관심을 보이고 있다. 박호윤 KPGA 사무국장은 “우리 젊은 선수들의 국제 경쟁력이 높아짐에 따라 자연히 국내 투어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며 “올 시즌 아직 2개 대회 밖에 치르지 않았지만 예년에 비해 분위기가 확실히 다르다”고 했다. 이어 “신규 대회 창설로 곧바로 이어지긴 힘들지만 협회의 노력과 한국 남자 선수들의 해외에서의 활약, 그리고 팬들의 관심이 서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면 분명 좋은 성과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위대한 군주’ 칭기즈칸은 “성을 쌓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며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고 했다. 한국 남자 골프 선수들의 유목민적인 도전 정신이 역으로 국내 투어를 살리는 한 방편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실감하는 요즘이다.

김세영 마니아리포트 국장 freegolf@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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