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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90]위대한 2인자, 빙그레 이글스의 추억

이정훈 필두로 이강돈, 장종훈, 강정길 등 '건제 과시'

2014-02-08 19:52

▲빙그레이글스다이너마이트타선필두에섰던이정훈현한화2군감독.사진│김현희기자
▲빙그레이글스다이너마이트타선필두에섰던이정훈현한화2군감독.사진│김현희기자
[마니아리포트 김현희 기자]1990년대 프로야구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프로야구의 관전 문화’가 바뀌었다는 데에 있다. 프로야구 출범 당시만 해도 ‘화이트 칼라’로 대변되는 남성 직장인들이 퇴근 이후 야구장을 찾거나 모기업 차원의 단체 응원이 주를 이루었던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실제로 1984년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삼성 그룹은 막판에 몰린 계열사 ‘라이온스’에 힘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 비싼 티켓값을 모두 지불하고 단체 응원을 진행한 바 있다.

그러다 1990년대 중반에는 야구장에 ‘여풍(女風)’이 불기 시작했다. 이는 종전까지 프로스포츠가 ‘남성’의 전유물이었다는 고정관념을 보기 좋게 깨뜨리는 현상이기도 했다. 스포츠를 즐기는 남/녀가 데이트 장소로 야구장을 선택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이는 그라운드에 실력을 바탕으로 ‘훈남’이나 ‘미남’들이 많이 등장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이너마이트 타선’을 자랑했던 추억의 팀, 빙그레 이글스(한화 이글스 전신)도 마찬가지였다.

‘위대한 2인자’, 빙그레의 추억

대전/충청 지역은 OB 베어스(두산 베어스 전신)가 서울로 떠난 이후 ‘프로야구 연고지’와는 인연이 없을 뻔했다. 그러나 한화그룹이 프로야구단 창단을 희망하면서 1985년에 제7구단으로 승인받게 됐고, 2군 리그 참가 이후 1986년부터 본격적으로 6개 구단 ‘형님’들과 1군 경쟁을 하게 됐다. 물론 당시까지만 해도 빙그레는 막내로서 이렇다 할 힘 한 번 써보지 못한 채 2년간 하위권을 전전해야 했다. 그러나 김영덕 감독 부임 이후 1988시즌에 처음으로 한국시리즈에 오르며 ‘신생 구단’의 반란이 시작됐다.

이후 빙그레는 ‘틈이 날 때마다’ 한국시리즈에 오르며 정상급 실력을 과시했다. 여기에는 한희민, 이상군을 비롯하여 ‘송골매’ 송진우, 젊은 투수의 선두 주자인 한용덕 등 마운드의 힘이 전제되어야 했다. 또한, 고졸 루키 정민철과 ‘멀티 플레이어’ 구대성 등도 1990년대에 입단하여 빙그레 마운드를 이끄는 버팀목이 됐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빙그레 이글스’를 기억하는 이들의 뇌리 속에는 ‘다이너마이트 타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때 4할 타율에 도전했던 리드오프 이정훈을 필두로 ‘대포를 잘 쏘아 올리는 2번 타자’ 이강돈, 중심 타선의 강석천, 장종훈, 강정길 등이 맹타를 휘둘렀다. 여기에 포수 김상국과 유격수 지화동, 외야수 진상봉도 ‘한 방’을 갖추고 있어 1번부터 9번까지 쉬어 갈 틈이 없었을 정도였다. 이를 바탕으로 1992년 정규시즌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빙그레는 유독 한국시리즈 우승과는 전혀 인연을 맺지 못했다. 창단 이후 1992년까지 무려 네 번이나 한국시리즈에 올랐지만, 모두 준우승에 머물러야 했다. 그 중 세 번은 해태 타이거즈(KIA 타이거즈 전신)에게 내주어야 했고, 1992년 정규시즌 우승 직후에는 박동희-염종석이 버틴 롯데를 당해내지 못했다. 결국, 빙그레는 1993년 팀이 부진에 빠지자 팀 명을 모기업인 ‘한화’로 바꾸고 1994시즌부터 한화 이글스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팀 명을 바꾼 지 5년이 지난 1999년이 되어서야 한국시리즈 패권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것이 한화 이글스의 가장 최근 우승이었다.

대전/충청지역을 바탕으로 만만치 않은 전력을 구축했던 빙그레는 단기간에 좋은 성적을 낸 것으로 유명했고, 이들의 선전은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도 이어졌다. 비록 ‘빙그레 이글스’의 이름으로는 단 한 번도 우승을 이끌지 못했지만, 당시 그들은 ‘위대한 2인자’였고, 은퇴 이후에는 후배들을 양성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던 이들이었다.

[eugenephil@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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