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뜨거운 야구장의 열기는 ‘국내’에 한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메이저리그나 일본 프로야구가 활성화된 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AFKN(주한 미군 국내 방송망)을 통하여 잠시나마 메이저리그 경기를 시청하거나 부산을 중심으로 일본 프로야구를 볼 수 있는 것이 전부였다. 해외 시장을 모르는 팬들 입장에서는 ‘국내 프로야구의 열기’가 전부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첫 정식종목 채택’ 올림픽 야구의 첫 결과는?
하지만 ‘국내 프로야구가 최고’라고 여겨졌던 바로 이 시기에 국제무대에서는 꽤 의미 있는 일이 발생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기점으로 야구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직전에 열린 1988 서울 올림픽에서 야구가 시범 종목으로 치러진 이후의 일이었다. 이에 대한야구협회에서도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첫 번째 올림픽에서 메달권에 진입하기 위해 많은 A급 선수들을 끌어 모으기도 했다. 물론 프로 선수들의 참여가 다소 제한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 해도 당시 대학 선수들의 실력은 그야말로 ‘프로야구 즉시 전력감’이었다.
당시 대표팀 엔트리에 포함되었던 선수들은 총 29명. 이 중 프로야구 한화 소속이었던 포수 장광호와 황일권 뿐이었다. 나머지 27명의 선수는 추후 프로야구 무대에서도 명성을 떨쳤던 대학 야구 선수들이었다. 투수로는 한양대 정민태와 구대성, 동아대 지연규, 인하대 위재영, 연세대 문동환, 단국대 김홍집 등이 유명했고, 포수로는 단국대 강성우와 고려대 임수혁이 대표적인 ‘대학 스타’들이었다. 내/외야 라인은 더욱 탄탄했다. 대학 선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일간지 스포츠면에 자주 등장했던 ‘괴물타자’ 추성건을 비롯하여 ‘바람의 아들’ 이종범, 한양대의 제간둥이 유지현, 연세대 안경현 등이 내야를 책임지고 있었고, 국제무대에서 숱하게 명성을 떨쳤던 고려대 거포 심재학, 중앙대 동봉철, 후에 ‘양신’으로 불린 영남대 양준혁 등이 외야 라인을 지키고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아시아 예선을 통과하여 바르셀로나 본선 무대를 밟을 만했다. 그러나 국내 대학 선수들의 패기는 아시아 무대에서 일본과 타이완을 넘어서기에는 다소 부족했다. 대륙간컵 대회를 비롯하여 규모가 크지 않았던 아마추어 대회 경험만으로는 올림픽 무대까지 정복하기 어려웠던 셈이었다. 결국, 당시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은 25개 정식종목 중 야구를 제외한 24개 종목에 출전했다. 그리고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첫 번째 올림픽에서 총 8개국이 출전하여 쿠바가 7전 전승으로 금메달을 차지했다. 아시아 대표로 참가한 타이완과 일본은 각각 은메달과 동메달을 차지했다.
이렇게 쓰디 쓴맛을 봤던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은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는 미국 땅을 밟았지만, 정작 본선 무대에서는 쿠바, 니카라과, 일본, 미국 등에 나란히 참패하면서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나마 거둔 1승도 네덜란드전에서 기록한 것이었다. 국제무대에서 그다지 큰 재미를 못 봤던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1990년대에 유일하게 웃은 것은 ‘드림팀 1’이 탄생했던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전승 우승’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을 때였다. 바꿔 표현하자면, 1998년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야구는 국제무대에서 이렇다 할 활약을 펼치지 못했던 셈이다. 이것이 불과 16년 전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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