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한국전쟁,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야구 이야기'

상무야구단의 모태, 한국전쟁에서부터 시작

2013-06-25 07:12

▲전역이후팀의중심으로거듭난LG김용의.사진│LG트윈스
▲전역이후팀의중심으로거듭난LG김용의.사진│LG트윈스
[마니아리포트 김현희 기자]전쟁은 당사자들의 모든 것을 앗아가고,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인류 최대의 재난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으로 인한 영향은 스포츠인 야구에도 고스란히 미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지금으로부터 53년 전인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할 때 UN군의 일원으로 우리나라에서 방망이와 글러브 대신 총을 들고 싸웠던 벽안의 야구 선수들도 있었다. ‘마지막 4할 타자’ 테드 윌리엄스가 ‘공군 장교’ 신분으로 국내에 입국했던 것을 시작으로 어니 뱅크스, 화이티 포드 등 수많은 ‘명예의 전당 헌액자’들이 전장을 누볐다. 이들이 더 대단한 것은 자신들의 커리어에 1안타, 1승을 더 추가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뿌리치고 국가의 부름에 응답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비록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지는 않았어도 메이저리그 역사상 유일하게 신인왕, 사이영상, MVP를 모두 받았던 '흑인 투수' 돈 뉴컴도 한국전에 참전했다. 1952년부터 2년간 잠시 그라운드를 떠나며 낯선 한국 땅을 밟은 그는 은퇴 이후 일본 프로야구에서 타자로 활약하며 '메이저리거의 일본진출 1호 선수'라는 특이한 경력까지 남겼다. 또한, 양키스 소속으로 한국전에 참전하여 무려 120차례 전투 비행 기록을 남긴 제리 콜맨은 오히려 ‘대령 계급장’이 더 어울릴 만한 업적을 올리기도 했다. 약 340명의 메이저리거와 3000명의 마이너리거가 징집 또는 자원입대를 통해 2차 대전과 한국전쟁에 참가했으며, 그 중 35명은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군 복무에 임하는 야구선수들에 대한 ‘단상’

물론 ‘한국전쟁’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국내 야구 원로들도 있다. 1947년, 청룡기 대회 최우수 투수상을 받았던 경남중학교(경남고등학교 전신) 장태영을 비롯하여 '아시아의 철인' 박현식, 서울대학교 상대 출산의 이용일(전 KBO 총재 대행) 등이 대표적인 케이스다. 이들은 전쟁이 끝나지 않았던 1953년 초에 창단된 '육군 야구부'의 일원이기도 했다. 또한, 공군에서도 KBO 초대 심판위원장을 역임한 이기역씨를 필두로 야구부를 꾸렸다. ‘상무 야구단’의 모태는 이렇게 꾸려졌다. 이후 김소식(전 대한야구협회 부회장), 한동화(전 신일고 감독)등이 해병대와 육군 야구단에 합류하여 명승부를 연출하기도 했다.

이렇게 전쟁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했던 ‘인생의 선배’들이 있었기에 현재 한국 프로야구가 중흥기를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 상무나 경찰 야구단, 혹은 현역병사로 국방의 의무와 야구 실력 향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이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다. 전쟁을 경험했던 이들은 이후 재개된 청룡기/황금사자기/화랑대기 대회에 다시 나타나 사람들에게 꿈을 주었고, 이들의 활약은 박노준/김건우 등의 등장으로 ‘여고생 오빠부대’의 탄생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1953년 육군 야구부 창설 이후 현재 상무 야구단까지 근 60년 동안 약 900명 정도의 야구 선수들이 전투복을 입었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는 야구 감독이나 KBO 사무총장 등의 역할을 자임하며 한국야구의 기반을 다지기도 했다. 상무나 경찰 야구단 전역 이후 신인왕을 비롯한 개인 타이틀을 거머쥔 이도 있었다.

또한, 상무나 경찰야구단 입단도 여의치 않아 현역병으로 만기전역을 한 이후에도 그라운드에 다시 복귀하여 팀의 주축이 된 선수들도 적지 않다. 이들의 활약상 역시 많은 이들에게 잔잔한 충격을 안겼다. 해병대 전역 이후 팀에 복귀했던 권오준(삼성)과 윤요섭(LG), 의장대에서 군복무를 마친 김용의(LG), 역시 육군에서 군 복무를 마친 권용관(LG)과 정성기(NC)가 바로 그러한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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