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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평야 골프종주기]<중>골프의 신과 돈키호테

2013-05-10 17:51

[호남평야 골프종주기]<중>골프의 신과 돈키호테
[마니아리포트 김세영]농사의 절반은 하늘이 짓는다. 농부에게 날씨는 이처럼 중요하다. 골퍼들에게도 라운드 당일 날씨 체크는 필수다. 둘째날 아침, 눈을 뜬 후 가장 먼저 날씨부터 확인했다. 기온은 전날보다 6도 가량 내려갔지만 다행히 바람은 불지 않고 제법 화창했다. 아무리 기온이 떨어져도 바람만 없으면 그다지 춥게 느껴지지는 않는 법이다. 농사나 골프나 얼굴에 바람 맞으며 땅을 팔 때가 가장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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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지는 김제시 성덕면 고현리로 정했다. 시골마을의 아침은 고즈넉하기 그지없었다. 농촌에 원래 사람이 없는 데다 농한기라 더더욱 조용했다. 마을에 보이는 사람이라고는 우리 일행뿐이었다. 낯선 이들의 방문에 개들만이 요란한 소리로 반겼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9번 아이언으로 첫 샷을 날렸다. 두 번째 샷 지점에 가니 볼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기온이 전날보다 내려가 땅이 얼어 있었던 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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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에는 농사를 관장하는 신농씨(神農氏)가 논에서 골프하는 걸 못 마땅하게 여기고 바람으로 시련을 줬다면 이튿날에는 이를 안타깝게 여긴 골프의 신(神이) 화창한 날을 선물한 듯했다. 그곳 논에는 보리를 갈아 놓은 곳이 많지 않았다. 보리가 심어져 있으면 스윙을 하면서 작물을 파헤치게 되므로 매트를 사용하지만 아무 것도 없는 논에서는 볼을 벼 그루터기 위에 올려놓고 스윙을 하면 됐다.

◇누군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고현 마을에서의 마지막 샷은 농수로에 빠졌다. 그곳에서 수로 건너편 논을 향해 다시 샷을 날린 후 마을을 거의 빠져 나가고 있을 무렵 촌로(村老) 한 분이 오토바이를 타고 다가왔다. 또 다시 직감했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뭐 하는 사람들이냐고 물었다. 이미 경험했던 터라 이번에는 당황하지 않고 차근차근 설명했다. 알고 보니 그 분은 마을 이장이었다. 나 역시 정읍 고부에서 이장을 맡고 있다고 하자 우리의 뜻을 잘 이해해 주시며 “열심히 하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이렇듯 시골에서 낯선 사람은 금방 눈에 띄게 마련이다. 그리고 지켜보는 시선이 없는 듯 하지만 있는 게 시골이다.


시골의 봄은 벌써 시작됐다. 한 할아버지가 논에 거름을 내고 계셨다. 샷을 날린 후 지나가면서 “수고하시네요”라고 인사말을 건네자 “즐거운 일 하는구만”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앞서 우리의 골프카트인 트럭을 몰고 갔던 친구가 한참 그 분과 함께 있는 게 눈에 들어왔는데 그 때 우리의 얘기를 한 모양이었다.

◇길 위의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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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에는 출발부터 워낙 악조건이었던 데다 첫날이라 약간 우왕좌왕한 면도 있었다. 하지만 둘째 날부터 날씨도 도와 주고 어떤 식으로 진행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자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여유는 주변을 둘러보게 만든다. 잠시 잊고 있었던 친구가 보였다. 친구 역시 그랬다. 골프는 인생이라 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함께 걸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이번 이벤트의 준비과정에 대한 소회, 올해 농사 계획, 서로의 가정, 그리고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서도 허심탄회한 말들을 주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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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몇 년 앞서 귀농한 친구는 농사에 있어서는 나의 멘토다. 처음 귀농해 뭘 해야 할지 막막하던 시절, 친구의 조언은 큰 힘이 됐다. 가끔 일을 마친 저녁 술 한 잔 나누면서도 많은 얘기를 나눴지만 이번 논두렁골프를 함께 하며 가슴 속 깊은 말들을 꺼냈다. 특히 김제 성덕면 고현에서부터 죽산면 대창리까지의 5km 코스는 이번 여행에서 가장 여유 있는 구간이었다. 그곳을 지나며 친구에게 골프 레슨을 하기도 했다. 다음에는 친구와 내기골프를 즐기며 올해의 길을 다시 걸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동진강에 펼쳐진 마스터스의 물수제비 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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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으로 원평천을 접한 김제 대창리의 어느 다리 옆 공터에서 라면과 햇반으로 점심을 떼운 후 동진강으로 향했다. 호남평야 남부 지역에 물을 공급하는 큰 강이다. 만경강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곳에서도 강 건너편으로 티샷을 날리기 위해 갈대숲을 헤쳐 앞으로 나갔다. 다행히 모래사장까지 갈 수 있었다. 그곳에 티를 꽂고 드라이버를 휘둘렀다. 하지만 속칭 ‘쪼로’가 나고 말았다. 티를 꽂은 땅이 발보다 낮다는 점을 감안했어야 하는데 그냥 휘두른 탓에 볼이 헤드 아랫부분에 맞고 만 것이다. 결과는 오히려 좋았다. 볼이 물수제비를 뜨면서 건너편 강변까지 간 것이다. 마치 ‘명인열전’ 마스터스 개막 전에 이벤트로 물수제비 뜨기를 한 것처럼 말이다.

◇거인을 무찌른 돈키호테
동진강을 건너면 부안이다. 그곳의 시작점은 동진면 장등리다. 하지만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한 블록을 더 지나쳐 시작하고 말았다. 가다 보니 길이 끊기는 곳이었다. 하는 수 없이 차량으로 이동한 후 다시 하장리 방향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1km 정도 전진을 하면 서해안고속도로다. 고속도로 아래로 난 굴다리를 지나 우리는 부안IC 부근을 통과해 747번 지방도로로 접어들었다.

747번 지방도로는 국내 여느 도로에서는 보기 드물게 부안에서부터 정읍까지 평야를 따라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평야라는 걸 실감할 수 있는 도로다. 여기서부터는 길잡이가 따로 없어도 도로 옆 논만 따라가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논은 대개 가로 100m, 세로 40m 길이로 바둑판처럼 반듯하다. 길을 따라 놓인 전봇대는 50m마다 하나씩 꽂혀 있다. 특별히 기준점이 될 만한 지형지물이 없더라도 전봇대와 논의 숫자만 파악하면 거리를 계산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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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줄곧 9번 아이언으로 짧게 끊어 왔지만 747번 도로에 접어든 이후에는 7번 아이언을 꺼내 들었다. 세 번의 샷으로 단숨에 약 450m 구간을 돌파했다. 바로 이어진 두 번째 구간은 전봇대 숫자를 세보니 약 600m다. 마침 저 멀리 호남평야에서 생산되는 엄청난 양의 쌀을 가공하는 곳 중 하나인 부안 미곡처리장이 웅장한 기세로 떡 버티고 있었다. 돈키호테가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하고 돌진했듯 난 그 거대한 미곡처리장을 향해 돌진하고 싶었다. 5번 아이언을 강하게 휘둘렀다. 그리고 세 번의 샷 만에 거인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거인을 무찌르자 희열이 가슴 가득 밀려왔다.

◇Man vs Wi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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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세를 몰아 이날은 야외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저녁을 먹기로 했다. 야영은 하지 못하더라도 불 피우고 그 위에 고기 한 점 올리는 재미는 있어야겠다는 생각에서다. 날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돈키호테의 애마 로시난테로 변신한 1t 트럭에 올랐다.

이번 골프여행을 준비하면서 난 전투용품 전문 쇼핑몰에서 파이어 스틱(부싯돌), 자가발전 라디오와 여러 개의 랜턴, 그리고 구급용 덮개 등을 구매했다. 남자라면 사용하건 안 하건 한 번쯤 가지고 싶은, 요샛말로 ‘머스트 해브’(must have) 아이템들이다. 구매를 했으니 잠시나마 사용하고 싶은 욕구도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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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초인 내게 그 흔한 일회용 라이터가 없었을 리 만무하지만 그건 야생의 멋이 아니다. 마른 덤불을 모으고 파이어 스틱을 긁어 불을 피웠다. 잠시나마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방영하는 프로그램 「인간 대 자연」(Man vs Wild)의 주인공 베어 그릴스를 흉내 내고 싶었던 까닭이다. 우린 그 불 위에 고기를 굽고, 인생을 음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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